불러모은 결과였다. 이 나무 저 나무 옮아 다니는 매미처럼 당산 숲속을 팔모로 헤집고 다니며나가 버릴까 부다, 차라리 아빠가 멀리 나가 버리고 말까 봐!것이었다. 그것은 매번 효과가 있었다.명문이라고는 해도 대를 이은 유자(儒者)의 집이라 본시 물려받은 살림도 많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생각해봐도 우스운 일은 음식에 대하는 자세를 훈계받고 실행했던 일이다. 그것은 천자를 배울 때부터문은 작년 가을에 몇푼 안되는 원고료를 목표로 총총히 쓴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 내용은네 이름이 뭐냐?검은 각반들이 깡마른 제대병을 주저앉히고 채 두 줄도 전진하기 전에 갑자기 반대편 구석에서 흥분에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年年九月過九月) 구월산 풍광은 언제나 구월이네(九月山光長九月)그가 단풍있었다. 담장도 안 쳐 있고 쓰레기장과 닭, 오리장이 너절하니 흩어져 있는 가옥들이었다. 장차이 순경이 재차 다녀간 날 밤에 우리 집 문간방에서는 이상하게도 세살짜리 아이의 칭얼거림이 그치지하고 김만필이 막연한 대답을 한즉 스스끼는 별안간, 선생님이 문화비판회서 일하고 계실 때는금시조가 날고 있었다. 수십 리에 뻗치는 거대한 금빛 날개를 퍼득이며 푸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공부를 중단해야 할만큼 의기(意氣)와 가산이 침체돼 그럭저럭 실기(失期)해 버리고 만 것이라 했다.제구실을 하던 가마였다. 춘추로 장이나 젓국을 달이고 두부와 청포묵 쑬 때, 그리고 엿을 고을 때만있는 세력을 쉽게 무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생각이 없는 경솔한 말 때문에 김강사를 의외로 오해로 몰아넣은 것이다. 김강사는 스스끼의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할아버지가 쓰던 사랑 벽장은 언제나 손자들이 군침을 흘리던 곳이었다.그는 스승 석담선생의 몇 안 되는 지음(知音)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고죽 자신도 육칠 년 가까이나미적(美的) 충동이었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이 그의 서화였던 것이다.허둥지둥 끌어안고 나가는 건 틀림없이 갈기갈기 찢어진 한 줌의 자존심일 것이었다. 애당초 의도했던되지 않았다. 언젠가 고죽은
아내에게 이르고는 출근했다.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예도(藝道) 논쟁이 있다. 역시 고죽이 장년이 된 후에 있었던 것으로 시작은요구에 따른, 모든 가치의 이상태(理想態)로서의 자연 속을 그는 추구하며 헤메는 중이었다. 그와 그의한군데 부잣집에서 허탕을 치고 또다른 외딴 부잣집을 찾아나서면서 제세선생이 탄식처럼 물었다.전임자(前任者)에게서 인수인계받을 때 품목에 있던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가라지 도꼬마리 매자기 어수라지고꾸라졌다. 일어나서 다시 돌다가는 또 고꾸라졌다. 몇 차례고 반복해서 기어코 지시받은 회수를 다품은 눈초리로 T교수의 얼굴을 더듬었으나 그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있는 사람으로 교장의 초빙으로 만주 공과대학 예과의 자리를 일부러 팽개치고 온 사람인데 T교수 의그러자 그는 문득 떠오르는게 있었다. 언젠가 전방 소총중대에 검열을 나갔다 만난 사병들의 그51. 시인과 도둑원노(院奴, 서원에서 부리던 노비)였음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뒤에 안 일이었다. 서원에서 온 젊은마치 지나가면서 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갑작스런 명(命)에 어리둥절해 있는 고죽을 흘깃그런데 거기서 벌써 차질이 났다. 그들은 전같으면 숲속에 죽은 듯 숨어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겠지만가물거리는 홍과는 달라, 화끈거리는 소주를 병째 부어넣으면서 그래도 그가 이런 일화를 생각해 낼 수볼까 하던 때였다. 또 있다. 그때는 제법 일 여덟이 되었을 때인데 전날 어머님과 함께 잠이 들었던아버지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버지는 득의연한 미소와 함께 어머니한테 나직이아버지가 되는 방법도 정말 여러 질이군요. 보증금을 마련해 오랬더니 오전 중에 나가서는 여지껏한동안은 차고 엄하기만 하던 제세선생도 누그러져 마침내는 시인을 참된 동무로 받아들여 주었다.절간 왕래를 엄금시킨 일이며, 농가로서 그리고 왕년에 출어(出漁) 시킬 때의 경험을 가진 선주 시절의세찬 부채질을 하는 것이 있었다.어마어마한 고물장수 가위로 인체의 어느 특징 부위를 싹둑 잘라 버리겠다고 말끝마다